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토리 에르제베트 (문단 편집) === 명문 귀족의 딸 === [[바토리#s-1]] [[남작]], 또는 바토리 부인이라고 알려진 이 인물은 1560년 [[트란실바니아]] 지방의[* 우연의 일치겠지만, [[블라드 3세]]와 그를 모티브로 한 [[드라큘라 백작]]의 고향이기도 하다. 뭐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오늘날의 헝가리 영토에서 태어난 헝가리인,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헝가리인의 친척뻘인 [[세케이인]], 그리고 블라드 3세는 몸만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난 라틴계의 왈라키아인([[루마니아인]])이라는 세세한 차이점이 있긴 하다.] 명문가인 바토리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. 그녀의 어린시절에 바토리 가문은 [[트란실바니아 공국|에르데이 공작]]이자 나중에는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의 왕으로 선출된 [[스테판 바토리|바토리 이슈트반]](Báthory István)[* [[폴란드어]]로는 스테판 바토리(Stefan Batory), [[리투아니아어]]로는 스테포나스 바토라스(Steponas Batoras).]의 치세 아래 동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위세를 떨쳤다. 에르제베트의 어머니 바토리 언너(Báthory Anna)가 바토리 이슈트반의 누나라, 에르제베트는 바토리 이슈트반의 조카라는 높은 위치였다. 젊은 시절에는 점잖고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졌으며 궁중의 예법을 배워 [[현모양처]]에 가까운 이미지였다. 에르제베트는 에체드(Ecsed) 성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571년 11세에 5살 연상인 나더슈디 가문의 장남 나더슈디 페렌츠(Nádasdy Ferenc) [[백작]]과 약혼했다. 그 후 [[시어머니]]가 될 [[우르슬라|오르쇼여]](Orsolya)로부터 무인의 아내가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[[민며느리|미리 배우기 위해]] 시댁인 샤르바르(Sárvár) 성으로 보내졌다. 오르쇼여는 매우 엄하고 잔소리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 에르제베트에게 잔소리를 끊임없이 했다고 한다. 1575년 약혼자였던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과 결혼했는데, 이때 식장에는 하객 4500명이 참석하는 등 위세를 과시하였다. 그런데 에르제베트는 남편보다 신분이 더 높았다. 나더슈디가 [[장군]]이나 [[재상]]이 되는 [[귀족]]임에 비해 에르제베트는 공녀급 신분[* 폴란드-리투아니아 연방이나 에르데이 공국이나 다 [[선거군주제]]였기 때문에 세습지위는 아니지만, 국가를 통치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일개 지방귀족과는 비교를 불허한다.]이었다. 그 덕분에 결혼 후에도 '바토리'라는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. 그후 에르제베트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1585년부터 1598년까지 자녀 5명을 낳았다. * 나더슈디 언너(Nádasdy Anna, 1585~?): [[크로아티아 왕국]] 출신 귀족 즈리니 미클로시 6세(Zrinyi Miklós VI)의 아내가 되었다. * 나더슈디 오르쇼여(Nádasdy Orsolya, 1590~?): 베뇨 이슈트반 2세(Benyó István II)의 아내가 되었다. * 나더슈디 커털린(Nádasdy Katalin, 1594~?) * 나더슈디 언드라시(Nádasdy András, 1596~1603) * 나더슈디 팔(Nádasdy Pál, 1598~1650) * 그 외에 나더슈디 미클로시(Nádasdy Miklós), 나더슈디 죄르지(Nádasdy György), 나더슈디 페테르(Nádasdy Péter)라는 자녀가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